[조선일보] 팝아트의 재발견인가, 예술 정신의 실종인가

Date
2007-07-24 23:55

 

조선일보
[리뷰] 팝아트의 재발견인가, 예술 정신의 실종인가
2007.07.24
 
박영택 경기대 미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최근 한국현대미술의 지형은 극사실주의와 팝아트의 변종들로 채워지고 있다. 고도의 소비사회와 대중문화의 번성, 영상이미지의 번창 속에서 파생된 대중들의 미적 감수성과 맞물린 부분도 있을 것이고, 보수적 미술시장의 유혹과 관련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요 몇 년간 팝이란 제목을 단 전시들이 줄을 이었다. 거기다 팝아트의 대부인 앤디 워홀의 전시가 얼마 전 성황리에 끝났다. 젊은 이들로 붐빈 전시장 풍경은 마치 쇼핑몰과 클럽에 모여드는 남녀들의 몸놀림과 오버랩되었다. 키치적이고 팬시한 감성, 장식적이고 관능적인 미감이 물씬거리는 통속적인 미적 감수성의 근원이 새삼 팝이었음을 깨닫는다. 이를 후기 팝 혹은 네오팝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소마미술관에서 열리는 ‘누보팝’전(9월30일까지·02-425-1077)에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스웨덴, 벨기에, 아르헨티나, 중국 등 7개국의 10명 작가가 참여했다. 이들은 다양한 문화적 배경에서 조금씩 다른 조형적 언어로 팝을 이야기 한다.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풍자와 이전의 팝아트에 대한 패러디 의식을 공유한다. 워홀을 대표로 하는 미국식 팝아트와 달리 누보팝에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즉 주제가 있고 시니컬한 정도가 심하며 콜라주 기법을 애용하고 있다. 
 
1960년대 중엽 워홀은 대중매체적인 시각문화의 기술을 미술에 적극 접목했다. 기존 미술의 폐쇄된 서술방식을 일상생활의 흐름으로 바꾸어놓았고, 사물과 지각의 세계를 구성하는 원리가 다름아닌 시뮬라크르(복제)에 있음을 최초로 지각한 이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미국식 소비주의를 찬양하는 팝이 아닌 비판적인 팝을 모색한다. 이 새로운 팝아트는 “인간적인 내레이션이 깔려있고 각자의 경험을 때로는 예민하게, 때로는 통속적으로, 때로는 풍자적이되 인간적인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는 것에서 미국 팝과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기획자는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흥미롭지만 반면 명확히 초기 팝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다소 의아스럽다. 워홀의 진정한 정신이 단지 감각적인 표피이미지로 차용되고, 새로운 팝 역시 지나간 팝에 기생해서 연장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워홀의 죽음과 함께 팝의 정신과 포스트모던의 담론 역시 증발되었다. 그런데 새삼 다시 팝이 논의되고 부활한다. 디지털 기술과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가상의 이미지가 활개 치는 시대에 대중과 미디어와 결합되어 있는 그 이미지들의 삶도 결국 팝이라고 부를 수 있기에 그럴까? 그러나 나로서는 출구 없는 미술계가 새삼 팝에 기생하며 감각적 이미지를 소모하는 형국이 오늘의 미술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